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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촬영지 탐방 (세탁소, 스와호, 시점 전환)

by 주말사랑단 2026. 2. 26.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이 기묘한 질문으로 시작해 각기 다른 세 가지 시점으로 한 사건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일본 여행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촬영지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나가노현 스와 지역에 있는 두 곳을 직접 방문했는데, 영화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세탁소와 스와호, 영화의 두 축

'괴물'에서 엄마가 일하는 세탁소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공간입니다. 저는 長野県諏訪郡下諏訪町西四王 지역에 있는 실제 촬영지를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동네 세탁소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이곳이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엄마의 생활 기반이자, 아들의 변화를 감지하는 첫 신호가 포착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탁소 촬영지 주변을 걸으며 저는 내러티브 포커스(narrative focus)라는 영화 기법을 떠올렸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포커스란 관객이 어느 인물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지 결정하는 서사 장치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 챕터에서 관객은 엄마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게 되는데, 세탁소는 바로 그 시작점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Suwa, Nagano 지역의 스와호 주변입니다. 영화 속에서 두 아이가 처음 진짜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는 장소로, 저는 이곳이 영화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호수를 바라보니 영화에서 느꼈던 고요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장면이 단순한 우정의 시작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미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고 봅니다.

세 가지 시점이 드러내는 진실

'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멀티 퍼스펙티브 내러티브(multi-perspective narrative) 구조입니다. 여기서 멀티 퍼스펙티브 내러티브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며 진실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총 세 번의 시점 전환을 통해 같은 시간대를 다시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엄마의 시점입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두 번째는 선생님의 시점인데, 이때부터 관객은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세 번째 아이들의 시점에서야 비로소 전체 퍼즐이 맞춰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세 번째 챕터에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마와 선생님이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사실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는 점, 그리고 아이들이 겪고 있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흑백논리로 단정할 수 없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올 줄 몰랐습니다.

촬영지를 방문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같은 장소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점입니다. 세탁소 앞 골목길도, 호숫가 벤치도 영화 속에서는 세 번씩 다른 감정으로 등장합니다.

LGBT 서사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괴물'은 퀴어 서사(queer narrative)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퀴어 서사란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를 의미하며, 이 영화에서는 두 소년의 감정선이 그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동·청소년 LGBT 영화는 커밍아웃이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섬세하고 은유적으로 접근합니다.

두 아이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괴물이거든요"라는 대사가 품은 이중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 폐건물 장면까지, 모든 것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의 틀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첫 LGBT 서사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칸 영화제 공식 인터뷰). 각본을 맡은 사카모토 유지 역시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故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영화 음악은 영화 전체에 깊은 울림을 더합니다.

촬영지를 방문할 때 저는 영화 OST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걸었습니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실제 장소를 바라보니, 영화를 볼 때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촬영지 방문이 과한 팬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좋아하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봅니다.

영화 속 계절과 비슷한 시기에 방문한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가을에 갔는데, 영화 후반부 장면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탁소 앞 골목길을 걸으면서, 스와호 주변을 산책하면서, 저는 이 영화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결국 '괴물'은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모두가 각자의 시선 속에 갇혀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촬영지를 찾아가는 일은 단순한 성지순례가 아니라, 영화가 던진 질문을 현실 공간에서 다시 마주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한 번쯤 촬영지를 방문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스크린 너머의 이야기가 현실과 만나는 순간, 작품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참고: https://youtu.be/9pf6G0zvsiU?si=7K7YUyGBHLT3peKK